(여행지도 유시내 기자) 가을이라 하면 흔히 단풍을 떠올리지만, 청주 낭성면 추정리의 들판에서는 전혀 다른 계절의 풍경이 펼쳐진다.

이곳에서는 붉은 빛 대신 눈부신 순백의 물결이 바람에 흔들리며, 한 폭의 수묵화를 닮은 가을을 완성한다. 메밀꽃이 활짝 핀 이 시기, 방문객들은 잠시 현실을 잊고 ‘하얀 안개 속을 걷는 듯한’ 낭만을 경험한다.
이 아름다운 풍경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한 사람의 오랜 철학이 스며든 땅이다. 토종벌 명인 1호로 알려진 김대립 씨가 40여 년간 벌과 함께 살아온 터전이 바로 이곳이다. 그의 손끝에서 시작된 메밀밭은 벌들의 먹이를 위한 ‘밀원(蜜源)’으로 조성된 것이지만, 그 결과물은 인간에게도 선물 같은 풍경이 되었다.
추정리 메밀밭의 면적은 약 9천 평(3만㎡)에 이른다. 이곳은 해마다 봄에는 유채, 여름에는 메밀로 옷을 갈아입으며 계절마다 다른 표정을 보여준다. 흥미로운 점은 이 땅이 평지가 아니라 완만한 언덕 지형이라는 것이다. 하얀 꽃이 층층이 겹쳐지며 만들어내는 풍경은 ‘하얀 파도’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입체적이다.

새벽이면 안개와 여명이 뒤섞여 언덕 전체를 감싸고, 그 사이로 벌들이 낮게 선회한다. 카메라 셔터 소리가 이어지고, 작가들은 이 짧은 시간의 빛을 잡기 위해 새벽녘부터 자리를 잡는다. “빛과 이슬, 그리고 꽃의 결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순간은 몇 분뿐”이라는 한 사진작가의 말처럼, 이곳은 그 자체로 예술의 무대다.
2025 추정리 메밀꽃 축제는 김대립 명인과 추정2리 마을회, 천년추정협동조합이 함께 만들어냈다. 축제는 단순한 꽃 구경을 넘어, 지역 공동체가 오랜 세월 가꿔온 생태적 조화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자리다. 지난해에는 10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다녀가며 전국적인 관심을 모았다.
축제의 매력은 ‘진정성’이다. 김대립 명인이 직접 채취한 토종꿀을 시식할 수 있고, 마을 주민들이 운영하는 직거래 장터에서는 지역 농산물과 수공예품을 만날 수 있다. 입장료 5,000원은 단순한 비용이 아니라, 꿀벌의 생태를 지켜온 이들에게 보내는 작지만 따뜻한 응원의 메시지다.

이곳을 찾는다면 몇 가지 유의할 점도 있다. 메밀꽃밭에는 벌이 많기 때문에 강한 향의 향수나 밝은 색 옷은 피하는 것이 좋다. 주차 공간은 한정돼 있어, 늦게 도착하면 추정1구 마을회관에 주차 후 언덕길을 걸어야 한다. 하지만 20분 남짓한 그 길조차 꽃잎이 흩날리는 풍경 덕분에 결코 지루하지 않다.
축제는 10월 19일까지 이어지며,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운영된다. 이 시기를 놓치면 다시 1년을 기다려야 한다. 그만큼 ‘지금 이 순간’에만 볼 수 있는 가을의 마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