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도 용태영 기자) 청송 주왕산 자락 깊은 곳, 안개가 낮게 깔린 호수 위로 오래된 나무들이 고요히 서 있다.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느껴지는 이곳은 바로 경북 청송군 주왕산면에 위치한 ‘주산지’다.

주산지는 단풍 명소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아름다움의 근원은 단풍에 있지 않다. 300년 세월 동안 물속에서 살아남은 왕버들, 그리고 그 뿌리를 감싸고 흐르는 지질의 비밀이 이곳의 진짜 이야기를 만든다.
국가명승 제105호로 지정된 청송 주산지는 조선 숙종 46년(1720)에 착공해 이듬해 완성된 인공 저수지다.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놀랍게도 단 한 번도 바닥을 드러낸 적이 없다. 가뭄에도 끄떡없는 이 저수지의 생명력은 인근 지질 구조에 숨겨져 있다.
이 일대는 과거 화산활동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지역으로, 물을 머금는 ‘응회암층’이 넓게 분포한다. 비가 오면 응회암이 물을 저장했다가 천천히 흘려보내 주산지의 수위를 일정하게 유지시킨다. 자연의 구조와 인간의 설계가 완벽히 맞물린 셈이다.

주산지를 대표하는 장면은 단연 물 위에 서 있는 20여 그루의 왕버들이다. 수령이 150년에서 300년에 이르는 이 나무들은 물에 잠겨 있으면서도 여전히 푸르고 단단하다. 보통의 수목이라면 수년 만에 고사했을 환경에서, 이들은 수백 년을 버텨냈다.
전문가들은 이 생명력이 일정한 수위와 토양의 산소 공급 구조 덕분이라고 설명한다. 주산지는 계절에 따라 물의 양이 크게 변하지 않아, 나무 뿌리가 썩지 않고 안정적으로 산소를 흡수할 수 있는 환경을 유지한다. 자연의 균형이 얼마나 정교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가을 새벽의 주산지는 마치 수묵화 한 폭 같다. 안개가 호수 위로 피어오르고, 붉게 물든 단풍이 수면에 비친다. 왕버들은 그 속에서 한결같이 제자리를 지키며 바람에 가지를 흔든다. 이 장면을 담기 위해 전국의 사진가들이 몰려들고, 여행자들은 새벽의 찬 공기를 뚫고 호수 가장자리에 선다.

이 풍경은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배경으로도 등장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실제로 마주한 주산지는 스크린보다 훨씬 더 깊은 울림을 준다. 그 안에는 인간의 흔적보다 오래된 시간의 결이 녹아 있다.
주산지의 매력은 화려함보다는 고요함에 있다. 주차장에서 전망대까지 약 1km의 산책로는 완만하고, 길을 따라 걷는 내내 흙냄새와 물소리가 동행한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공간이지만, 그 안에서 느껴지는 고요함은 각자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입장료는 없지만, 주왕산 국립공원 내 주차료(승용차 기준 5,000원)는 별도로 부과된다. 하절기에는 새벽 4시, 동절기에는 새벽 5시부터 입산이 가능해 이른 시간대에 물안개를 담으려는 여행자들의 발걸음이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