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도 유시내 기자) 제주 서귀포시의 중심부를 벗어나 남쪽으로 향하면, 깊은 숲과 맑은 물줄기 속에 자리한 돈내코 유원지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낸다.

관광지로 각광받는 한라산과 성산일출봉 사이, 이곳은 잘 알려지지 않은 제주의 ‘전설 속 계곡’이다.
이 유원지의 중심을 이루는 계곡은 양쪽으로 난대성 상록수림이 우거져 있어, 한여름에도 그늘과 서늘한 공기가 감돈다. 짙은 숲을 따라 1.5km 정도 걸어 들어가면 원앙폭포가 나온다. 높이 5m 남짓한 이 폭포는 크지 않지만, 주변 경관과 어우러져 아늑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매년 음력 7월 15일, 제주에선 특별한 풍경이 펼쳐진다. 백중날이라 불리는 이날, 주민들은 닭을 잡고 계곡물에 뛰어들어 ‘물 맞이’를 한다. 그중에서도 돈내코는 ‘신경통이 사라진다’는 구전이 전해지며 가장 인기 있는 장소로 꼽힌다. 전통에선 이날의 물줄기를 ‘한 해의 병을 씻어내는 신성한 물’로 여겨왔다.

민속적 배경이 담긴 이 풍습은 단순한 피서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현대에는 무속이나 전통신앙으로 치부되기도 하지만, 지역 주민들 사이에선 세대와 무관하게 전통처럼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돈내코’라는 독특한 지명은 처음 듣는 이들에게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이름에는 제주의 방언과 동물, 지형이 모두 얽혀 있다. ‘돗’은 돼지를, ‘드르’는 들판을, ‘코’는 하천이 흘러나오는 입구를 의미하는 제주어다. 다시 말해, 돈내코는 ‘멧돼지가 물을 먹으러 오던 내의 입구’라는 뜻이다.
과거 이 일대는 멧돼지 출몰이 잦아 ‘돗드르’라 불리며, 이는 오늘날 토평마을이라는 지명으로 이어졌다. 단순한 명칭을 넘어 지역의 생태적 특징과 인간의 생활이 맞물려 만들어진 역사적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숲과 물이 어우러진 이곳은 계절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여름엔 피서객, 가을엔 단풍 산책객들이 찾으며 자연휴식처로 각광받고 있다. 하지만 이처럼 인기가 높아질수록, 쓰레기 문제나 생태 훼손 우려도 함께 제기된다.
현재 일부 구간은 접근 제한 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보호종 식생 또한 분포하고 있다. 따라서 무분별한 개발이나 상업적 접근보다는, 생태와 전통을 모두 아우르는 지속 가능한 관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돈내코는 단순한 피서지가 아니다. 계곡의 물길과 숲, 그리고 이름에 담긴 이야기들은 제주 고유의 자연과 민속을 한데 묶어낸 ‘살아 있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급속도로 변화하는 도시화 속에서도,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는 더욱 크다.

최근에는 제주 문화유산으로서의 복원과 재조명 가치도 높아지고 있다. 특히 젊은 세대가 전통 풍습을 체험하고 공유하며,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문화 공간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돈내코는 제주가 제주다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 중 하나다. 단지 계곡이 아니라, 제주의 방언과 신화, 생태, 인간의 삶이 응축된 상징적 공간이다. 여름철 계곡 물소리보다 더 깊게 울리는 이야기가, 이곳 숲 어딘가에 숨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