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도 용태영 기자) 갑작스러운 비로 계획이 틀어진 제주도 여행,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비가 와서 더 특별해지는 장소들이 있다. 실내외를 넘나들며 오감을 만족시킬 수 있는 우중 여행 코스를 소개한다.
비 오는 날 제주를 느끼는 가장 감성적인 방법 중 하나는 풍경 사진을 감상하는 것이다.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은 바로 그런 감상의 중심지다.

폐교를 개조해 만든 이 갤러리에는 제주를 평생 담아온 사진작가 김영갑의 대표작들이 전시되어 있다. 오름, 바다, 하늘 등 제주의 자연이 비와 어우러진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다.
정적인 감상에서 벗어나 상쾌한 산책을 원한다면 사려니숲길이 제격이다. 이곳은 삼나무가 울창하게 뻗어 있는 숲길로, 비에 젖은 수목의 향기와 녹음이 청량감을 배가시킨다. 이름처럼 신성한 기운이 감도는 사려니숲은 우비 하나만 걸치면 사계절 내내 걷기에 적합하다.

조금 더 쉽게 접근 가능한 곳을 원한다면 비자림도 좋은 선택지다. 약 3천여 그루의 비자나무가 서식하는 이 숲은 독특한 생태 환경을 자랑한다. 특히 짧은 산책 코스는 유모차나 어린 자녀와 함께하기에 부담이 없다. 흐린 날씨와 잘 어울리는 이 숲에서는 제주 고유의 향과 생명을 느낄 수 있다.

비 덕분에 드러나는 제주도의 또 다른 면모도 있다. 엉또폭포는 평소에는 물이 흐르지 않지만 일정 강수량이 넘으면 절벽에서 웅장하게 쏟아지는 폭포를 감상할 수 있다. 비가 선사하는 순간적인 절경으로, 여행 일정에 유연성을 더할 수 있는 명소다. 단, 계단 구간이 있으므로 우천 시 안전에 유의해야 한다.
엉또폭포는 ‘비가 내려야만’ 출현하는 특별한 자연 현상으로, 제주 여행 중 비를 만났을 때에만 접근 가능한 레어템 같은 곳이다. 강수량 70mm 이상에서야 모습을 드러내며, 100mm를 넘기면 드라마틱한 폭포수가 절벽을 가르며 흘러내리는 장관을 연출한다.

폭포까지의 길은 크게 험하지 않지만, 계단을 따라 올라야 하므로 미끄럼 방지에 유의해야 한다. 또한 주차장에서부터 오르지 않고도 폭포의 일부를 볼 수 있어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엉또폭포 외에도 천제연 제1폭포 등은 강수량에 따라 그 위용이 달라지는 곳이니, 날씨를 역이용한 여행 전략으로 참고할 만하다.
실내로 눈을 돌리면 본태박물관이 눈에 띈다.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이 공간은 한국 전통 공예와 현대미술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전시관이다. 특히 쿠사마 야요이의 설치미술 <무한 거울 방-영혼의 광채>는 방문객들의 사랑을 받는 대표 작품이다. 실내 공간 특성상 날씨 영향을 받지 않아 여유로운 관람이 가능하다.

흔히 우중 여행은 제한된 이동과 불편함 때문에 기피 대상이 되기 쉽다. 그러나 비 덕분에 더욱 빛나는 장소들은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숲은 더 깊은 녹음을, 박물관은 더 몰입도 있는 감상을, 자연은 일시적이지만 강렬한 풍경을 선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