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도 유시내 기자) 9월 초, 계절은 서서히 가을로 기울지만 햇살은 아직 여름의 기운을 머금고 있다. 이 계절의 경계에서 담양 명옥헌 원림은 조용히 붉은 물결을 피워내고 있다.

전남 담양군 고서면에 위치한 명옥헌 원림은 국가 명승 제58호로 지정된 조선 시대의 대표적 민간 정원이다. 지금 이곳에는 100년 넘게 자리를 지켜온 배롱나무들이 진분홍빛으로 장관을 이루고 있다.
명옥헌의 시작은 조선 중기 선비 오희도의 삶과 맞닿아 있다. 세속을 떠나 자연 속에서 살기를 택한 그는 ‘망재(忘齋)’라 불리는 집을 지었고, 이후 그의 아들 오이정이 그 뜻을 기려 정자를 세웠다. 그 곁에 심은 배롱나무가 오늘날 20여 그루에 이르며 여름과 초가을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길게 피어 있는 백일홍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굵고 거친 나무껍질은 세월의 무게를 말없이 증명하며, 그 아래선 방문객들이 마치 조선의 한가운데에 들어선 듯한 기분을 느낀다.

정자의 이름인 ‘명옥헌(鳴玉軒)’은 옥이 부딪히는 듯한 청아한 물소리에서 유래했다. 이는 정원 내 두 개의 연못이 계곡과 맞닿아 있어, 비가 온 뒤 물 흐르는 소리가 특별하게 울려 퍼지기 때문이다.
정원 구조는 전통 조선 양식인 방지원도(方地圓島), 즉 네모난 연못에 둥근 섬이 놓인 형태로, 단순한 조경을 넘어 철학적 공간 개념을 반영한다. 이는 단지 걷고 보는 곳이 아니라, 사유하고 머무는 장소로서의 가치를 더한다.
정자 뒤편 바위에 새겨진 ‘명옥헌 계축(鳴玉軒 癸丑)’이라는 글귀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조선 후기 유학자 우암 송시열의 친필로 알려져 있으며, 이 공간이 단순한 정원이 아닌 사유와 풍류, 학문의 장으로서 존중받았음을 보여준다.

이 바위글씨는 명옥헌이 단순히 아름다운 경관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이유이기도 하다. 조선 지식인들이 자연 속에서 추구한 정신과 미학이, 지금도 이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많은 이들이 담양을 대나무 숲으로 기억하지만, 초가을의 담양은 백일홍의 고장이 된다. 특히 명옥헌의 붉은 꽃길은 대숲보다도 깊은 감흥을 안긴다.
사진을 찍기 위한 목적지라기보다, 조용히 앉아 자연의 소리를 듣고 붉은 꽃에 시선을 머무는 데 어울리는 곳이다. 오래된 나무와 고요한 연못, 정자 마루에서의 정적은 짧은 방문에도 오랜 여운을 남긴다.

명옥헌 원림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개방되며 입장료는 없다. 단, 마을 내 차량 진입은 제한되므로 공영주차장에 주차 후 600~700미터가량 걸어야 도착할 수 있다.
성수기인 주말이나 오후 시간대는 방문객이 많아 조용한 풍경을 즐기기 어렵다. 가능한 한 이른 오전 시간대에 방문하면, 붉은 꽃들 사이로 햇살이 퍼지는 순간을 혼자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