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도 유시내 기자)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경주에서는 황금빛 물결이 가장 먼저 계절을 전한다. 분황사 앞마당을 가득 메운 황화코스모스가 그 주인공이다.

경주시 분황로에 자리한 이 꽃밭은 3만㎡ 규모로, 9천 평이 넘는 땅 위에 주황빛과 노란빛이 뒤섞여 한 폭의 유화 같은 장관을 연출한다. 입장료와 주차비가 모두 무료라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많은 방문객들이 ‘분황사 코스모스’라는 이름 때문에 사찰 내부에 조성된 정원이라 오해하지만, 실제 꽃밭은 담장 밖에서 펼쳐진다. 주차장에서 내리자마자 눈앞에 황화코스모스가 끝없이 펼쳐져 여행의 시작부터 만족감을 선사한다.
햇볕을 가릴 그늘은 없지만, 오히려 탁 트인 공간 덕분에 꽃들은 제 키를 맘껏 뽐내며 하늘로 뻗어 오른다. 특히 석양이 비칠 무렵, 꽃밭은 ‘황금빛 파도’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을 만큼 장관을 이룬다.

코스모스의 화려함에 눈길을 빼앗기다 보면 자연스레 분황사의 낮은 담장 너머로 국보 제30호 모전석탑이 모습을 드러낸다. 선덕여왕 3년인 634년에 세워진 이 탑은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형태로, 흑빛 안산암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독특한 구조가 특징이다.
현재는 임진왜란 때 파괴돼 3층만 남아 있지만, 기단부의 사자상과 인왕상은 여전히 힘과 정교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꽃밭의 화사함 뒤로 묵직한 역사의 무게가 겹쳐져, 방문객들은 또 다른 감동을 경험하게 된다.
사찰 내부는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개방되며, 내부에는 고승 원효가 『화엄경소』를 집필한 자리도 남아 있다. 바로 옆에는 신라 최대 사찰이었던 황룡사지가 자리해, 꽃밭에서 역사 유적지까지 자연스러운 동선을 따라 걸을 수 있다.

낮에는 황화코스모스의 화려한 물결을, 해질 무렵에는 모전석탑의 고즈넉한 기운을, 그리고 밤에는 황룡사지 탐방로의 은은한 조명을 즐길 수 있어 하루 종일 다른 매력을 발견할 수 있다.
첨성대의 핑크뮬리나 동궁과 월지의 화려한 야경이 활기찬 경주를 보여준다면, 분황사는 한결 차분하고 성숙한 가을을 전한다. 담장 밖 꽃밭과 담장 안 유적지가 어우러지며, 화려함과 경건함을 동시에 품은 공간으로 여행자에게 이중의 경험을 선사한다.
천년의 역사가 깃든 땅 위에서 황금빛 꽃물결을 마주하는 순간, 가을의 한 장면은 오래도록 기억 속에 남는다. 경주의 계절을 진정으로 느끼고 싶다면 분황사의 황화코스모스를 놓쳐서는 안 된다.